der Anfang [anˈfaŋː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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모두 잠이 들고 어두워진 집안에 나는 자주 혼자 남아 한참을 깨어있었다. 정리해 놓아도 어수선하게 느껴지던 공간에서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겠지만, 오래 지나 떠오르는 건 그저 아무 것도 하지않고 오도카니 앉아있던 모습 뿐이다. 그 긴 밤들 중 거의 유일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. 네 살 짜리 니나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피아노에 문득 눈이 가던 밤.

한국에서 보내준 니나의 장난감 피아노에는 여러 동물의 얼굴들이 있었다. 버튼을 누르면 동물들의 우는 소리가 났다. 그 아래로는 두 옥타브 분량의 건반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. 차지한 자리의 크기로만 보자면 그 물건은 동물 소리를 내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. 당시의 내게는 그것이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유일한 악기였다. 나는 구부러진 램프 아래에 앉아 니나의 장난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내 손가락 너비보다도 좁은 건반을 마음이 가는대로 눌렀다. 어떤 멜로디가 만들어졌고 그걸 반복해 누르다 MP3플레이어로 녹음을 했다. 들어보니 그건 꼭 음악 같았다. 나는 내 손가락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 두고두고 기뻤고 이유 없이 쓸쓸해지던 당시의 마음도 조금 털어낼 수 있었다. 처음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.

세상에 태어나 살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시작이 있었다. 순전히 희망으로 가득했던 시작, 설레면서도 두려웠던 시작, 요란해서 불안했던 시작, 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던 시작, 그리고 시작인지도 몰랐던 시작. 끝이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이 나는 그 모든 시작이 좋았다.

'der Anfang’, 독일어의 ‘시작’. ‘곁에’라는 전치사 ‘an’과 ‘잡다’라는 뜻의 ‘fangen’이 합쳐진 말이다. ‘Anfassen(붙잡다)나 'Ergreifen(움켜쥐다)’라는 동사들도 가끔 ‘시작하다’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을 보면, 독일어에서 시작이라는 건 무언가를 잡는 행위와 연결되는가 보다. 내 곁을 스쳐 지나간 먼지만큼 많은 사건들과 존재들, 그 중에서 손을 내밀어 붙잡은 순간에 시작되었던 일들과 인연들… 그럴 듯한 연관이다. 장난감 피아노를 잡고 건반을 누르던 순간 음악이 시작되었고, 너의 손을 잡았던 순간 이전과 다른 미래가 시작되었다.

어느 해 봄을 맞아 대청소를 하다 잡동사니가 담겨있던 상자에서 장난감 피아노를 발견했다. 버튼을 눌러보니 이제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. 동물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. 니나의 손을 떠난 것을 두 번의 이사 중에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버리기로 했다. 그 사이 나에게는 통기타와 디지털 피아노가 생겼고 음악을 만들어 직업을 얻기도 했다. 시작했을 때에는 이런 미래를 몰랐듯이 지금 이 시작의 미래도 우리는 알 수 없다.

그래서 더 좋은 시작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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der erste Teil oder Abschnitt von etwas.
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
그렇게 하게 함. 또는 그 단계.
시작